크론병과 술 — 낭만이라 생각했던 것의 청구서

크론병과 술 — 낭만이라 생각했던 것의 청구서

민감한 주제부터 정직하게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크론병 진단을 받고도 십수 년간 술을 마셨습니다.

스무 살에 진단받았고, 젊었고, 술과 담배를 낭만이라 생각했습니다. 관해기가 길어지니 “나는 괜찮은 편인가 보다” 했죠. 그 결과가 어땠는지는 이 블로그 두 번째 글에 있습니다. 장 천공, 응급수술, 절개 17cm, 장 1m 절제. 물론 술 하나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방치의 목록에서 술이 큰 지분을 차지했다는 걸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크론병인데 술 마셔도 되나요?”라는 검색에 대한, 마셔본 사람의 답변입니다.

원론: 술과 크론병

알코올은 장 점막을 자극하고, 염증성 장질환에서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꼽힙니다. 복용 약과의 상호작용 문제도 있습니다. 크론병 약 중에는 음주와 병용 시 간에 부담을 주는 계열이 있어서, “마셔도 되나”의 첫 번째 답은 언제나 “당신의 약과 상태를 아는 주치의에게 물어보라”입니다.

현실: 그래도 회식은 온다

원론을 알아도 잔은 돌아옵니다. 제가 수술 이후 실제로 쓰는 방법들입니다.

  1. “약 먹는 중이라서요” — 최강의 문장입니다. 사실이기도 하고, 이 말에 술을 더 권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병명을 밝힐 필요도 없습니다.
  1. 첫 잔은 받고, 입만 댑니다 — 건배 문화에서 잔 자체를 거부하면 실랑이가 생깁니다. 잔은 소품으로 쓰고 마시지 않는 게 에너지 소모가 적습니다.
  1. 논알콜 맥주 활용 — 요즘 회식 장소엔 논알콜 옵션이 있는 곳이 많고, 잔에 따라두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단, 논알콜이라도 탄산이 부담인 날은 패스)
  1. 술자리 역할을 선점합니다 — 고기 굽기, 주문 담당, 다음 날 운전 예정자. 역할이 있으면 안 마시는 게 자연스러워집니다.
  1. 2차는 정중히, 일관되게 — 처음 몇 번이 어렵지, ‘쟤는 2차 안 가는 애’로 자리 잡으면 그다음부터는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일관성이 핵심입니다.

끊고 나서 알게 된 것

수술 후 저는 술을 거의 끊었습니다. 몇 가지가 달라졌습니다.

  • 아침 장 컨디션의 기복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 회식 다음 날이 무섭지 않아졌습니다
  • 술값과 그다음 날의 반나절을 돌려받았습니다
  • 그리고 의외로, 인간관계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술 없이 안 만나게 되는 관계라면 애초에 술이 관계였던 겁니다

마시는 분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크론병 환자마다 상태가 다르고, 관해기에 소량은 괜찮다는 주치의 판단을 받는 분도 있습니다. 이 글은 금주 강요가 아니라, “괜찮은 것 같은데?”가 십수 년 쌓이면 어떤 청구서가 오는지에 대한 한 사람의 기록입니다. 저는 그 청구서를 수술대에서 받았고, 여러분은 글로 받으셨으면 합니다.

※ 개인 경험이며 의학적 조언이 아닙니다. 음주 가능 여부는 복용 약물·질병 상태에 따라 다르니 주치의와 상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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