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론병 아빠의 15개월 아기 육아 — 체력이 없는 아빠의 체력 관리법

크론병 아빠의 15개월 아기 육아 — 체력이 없는 아빠의 체력 관리법

크론병 시리즈를 쭉 읽어오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저는 장이 남들보다 1m 짧고, 체력이 넉넉한 적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지금 15개월 아기를 키우고 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응급수술을 받으며 ‘내가 남편 노릇, 아빠 노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질문에 대한 15개월치 답안지입니다.

크론병 아빠의 육아가 다른 점

육아는 체력전인데, 우리는 체력이 자원이 아니라 ‘변동 환율’입니다. 어제 100이던 체력이 오늘 40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크론병 아빠의 육아 전략은 하나로 요약됩니다. 좋은 날의 기준으로 약속하지 않기.

실전 요령들

  1. 아침 장 루틴과 아기 아침의 분리

아기가 깨는 시간과 제 장이 요동치는 시간이 겹치는 게 최대 난제였습니다. 저희 부부의 해법은 시간대 분업입니다. 아침 첫 타임(기상~아침식사)은 아내가, 저는 그동안 제 몸을 정리하고 이후 타임을 온전히 맡습니다. 대신 저녁 목욕과 재우기는 제 고정 담당입니다. ‘반반’이 아니라 ‘내가 확실히 되는 시간에 확실히 맡기’가 서로 편했습니다.

  1. 컨디션 등급제를 부부 공용어로

활동기 신호가 오면 저는 아내에게 “오늘 노랑”이라고 말합니다. 초록(정상)-노랑(주의)-빨강(활동기)의 3단계인데,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아내가 그날의 육아 배분을 조정해줍니다. 만성질환자의 육아에서 제일 중요한 건 체력이 아니라 이 공용어를 만들어준 배우자와의 합의였습니다.

  1. 앉아서/누워서 하는 육아 목록 만들기

컨디션 나쁜 날에도 아빠 역할이 멈추지 않도록, 에너지 소모별 육아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 초록: 유모차 산책, 목욕, 몸으로 놀기
  • 노랑: 그림책, 블록, 앉아서 하는 역할놀이
  • 빨강: 누워서 아기 옆에 있어주기, 자장가, (그리고 아내에게 미안함과 고마움)

아기에게는 아빠가 ‘노는 방식이 다양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 목록 덕분에 저는 최악의 날에도 육아에서 완전히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1. 아기 이유식과 아빠 식단의 시너지

의외의 발견인데, 아기 이유식과 크론병 안전식은 철학이 같습니다. 심심하게, 부드럽게, 재료 하나씩 테스트. 아기 먹거리를 챙기다 보니 제 식단도 같이 좋아졌습니다. 아기 덕분에 야식도 완전히 끊었습니다. 밤에 깨는 건 아기만으로 충분하니까요.

  1. 내 병원 일정을 가족 캘린더에

정기 진료·검사 일정을 부부 공유 캘린더에 넣어뒀습니다. 내 몸 관리가 곧 육아 인프라 관리라는 걸, 아이가 생기고 나서야 진짜로 이해했습니다. 아프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다는 건, 무섭지만 강력한 관리 동기입니다.

같은 고민을 하는 분께

만성질환을 갖고 부모가 되는 걸 고민하는 분이 있다면 — 걱정의 방향이 저와 같으실 겁니다. ‘내 체력으로 가능한가’보다 먼저 오는 건 ‘아이에게 미안하지 않을까’라는 마음이죠.

15개월을 해보니, 아이에게 필요한 건 체력 좋은 아빠가 아니라 오늘 자기 옆에 있는 아빠였습니다. 그건 컨디션 등급과 상관없이 매일 할 수 있는 일이더라고요.

크론병(또는 다른 만성질환)과 육아를 병행하는 분들, 각자의 요령이 궁금합니다. 댓글에서 만나요.

※ 개인 경험의 기록입니다. 임신·출산·육아와 질환 관리에 대한 의학적 판단은 주치의와 상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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